자작글
  • No. 366   142 hit   2018-01-16 17:58:44
창염의 각(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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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겜 유머는 다른 곳에서
    Lv32 일상일상

예전에 써두었던 소설인데 이후 구상이 기억나지 않음 ㅎ

 

 

1. 前兆전조

 

남자의 눈이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끈적거리는 빛을 냈다.

시선은 어린 소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10살 정도 될까. 소녀는 수수한 검은색 책가방을 매고 인적 없는 골목을 걷고 있었다. 남자는 뱀 같은 혀로 입술을 훑었다. 남자는 소녀가 이 골목을 지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녀는 평소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과 언제나 함께였다. 물론, 고등학생 정도라면 힘으로 쉽게 누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수적 열세는 어떤 변수를 만들지 모르는 법이다. 소년이 방해하는 동안 소녀가 도망이라도 간다면 큰 곤혹을 치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소녀는 메트로놈과 같이 일정한 걸음으로 골목을 걷고 있었다. 혼자서. 언제나 붙어 다니던 소년은 오늘 보이지 않았다. 사냥감을 덮치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인 것은 분명했다. 남자는 소녀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지체 없이 행동에 나섰다. 남자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괜히 자극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도망치게 하는 짓은 3류의 몫이다. 발소리를 죽이고, 하지만 확실히 빠른 속도로 소녀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겨우 5m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튕기듯 달려들었다. 소녀는 저항 한 번 하지 못 하고 남자의 손에 입을 틀어막혔다. 양 손의 움직임은 남자의 다른 팔이 묶어두고 있었다. 아주 가까이에서 소녀의 얼굴을 본 남자는 마른 침을 삼켰다.

소녀는 아름다웠다. 그것은 남자의 악질적인 취향을 떠나서 보더라도 그랬다. 희미하게 붉은 빛을 띠고 있는 흑발은 허리까지 내려왔음에도 매끄러워 엉킨 곳 하나 없었다. 진부한 표현이었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광채와 그 감촉은 명주실과도 같았다. 소녀의 얼굴 또한 거기에 뒤지지 않았다. 무심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꾸미지 않은 수수하고 앳된 매력이었다. 들판에 활짝 핀 민들레의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역시 내 눈은 정확해. 남자는 자신을 칭찬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소녀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남자가 팔을 통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무기력함. 어떠한 의도도 없는 순수한 체념에서 나오는 탈력감.

남자는 지금까지 여럿의 소녀들을 덮쳤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죄질은 용서라는 말의 반대편에 서있는 것이었다. 그런 남자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 한 상대였다. 아무리 힘이 약한 아이들이라도 일단 붙잡으면 저항을 한다. 아무리 미약한 힘이라도 자신의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것을 짓밟는 것이 남자에게는 크나큰 희열이었다. 하지만 이 소녀는…… 남자는 소녀의 눈을 보았다.

차가운 것이 남자의 척추를 내달렸다. 뭐야, 이 녀석. 그것은 전에 본 적 없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무기력하게 반쯤 감은 눈꺼풀 사이로 빛 없는 암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것 또한 무기력.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체념의 빛.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에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심연이었다. 남자는 무심코 소녀를 가두었던 양팔을 풀었다. 하지만 그래도 소녀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남자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소녀의 눈가에 물기가 얹혔다. 그것은 금방 큰 방울을 이루어 하얀 뺨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물은 계속해서 맺혔다. 투둑투둑,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것이 공포로 인한 것이었다면 오히려 남자는 안심했으리라. 하지만 소녀의 눈물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무기력한 그 표정에 눈물만이 흐르고 있었다.

 

기분 나쁜 년……!”

 

남자가 휘두른 손은 공격의 의미보다는 벌레를 쫓아내려는 손짓에 가까웠다. 그만큼 그것은 기분 나쁜 광경이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데에서 오는 역겨움이 남자의 턱 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남자의 손이 소녀의 얼굴에 닿는 일은 없었다.

 

……뭐야 넌?”

 

남자의 손은 휘두르기 직전 허공에서 멈추어 있었다. 그 손을 붙잡은 것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소년. 소녀와는 대조적으로 귀와 눈썹을 덮을 정도로 기른 검은 머리카락은 조금 전까지 달리기라도 했는지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여자애처럼 선이 얇았지만 검은 눈동자는 안에서 고요한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남자는 금방 그를 알아보았다. 언제나 소녀와 함께 움직이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제가 묻고 싶은데, 당신은 뭡니까?”

 

흘러넘칠 정도로 적의가 담긴 소년의 말에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곧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뒤쪽에서 왔으니 보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한 골목에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남자는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 짓에는 도가 튼 남자 자신도 상대의 5M 앞까지 오면 단숨에 승부를 봐야 한다. 아무리 소녀에게 정신이 팔렸다지만 한 발자국 뒤에 있는 소년의 존재에 눈치 채지 못 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걸까?

남자는 작게 혀를 찼다. 이상한 점은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가느냐.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도망치는 것이다. 오늘은 비록 소년이 나중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언제나 붙어 다닌다. 그렇다면 도망쳤을 때 소년이 소녀를 데리고 자신을 따라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다음은 싸우는 것이다. 사실 싸우는 것도 아니다. 일방적인 폭행이 될 터였다. 소년의 얼굴을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때려준 후에 소녀를 취하면 그만이다. 원래는 소녀가 도망칠 것을 우려해서 절대 선택하지 않았던 방법이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흘리는 소녀를 보고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자의 행동은 바로 이어졌다.

 

네가 알 거 없어, 임마!”

 

남자는 전력으로 몸을 돌리며 붙잡혔던 팔을 빼냈다. 그리고 그대로 한 바퀴 돌아 빼낸 팔을 휘둘렀다. 권투 시합이었다면 절대로 쓰지 않을 허점투성이의 엉성한 훅이었지만 남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 때는 권투 챔피언과도 타이틀 매치를 펼쳤던 그였다. 당연히 엉성한 훅이라도 실력자 특유의 균형감각과 경험이 거기에 힘을 실어준다. 주먹은 곧장 소년의 머리에 빨려 들어갔고, 소년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랬어야 했다.

남자의 시야에서 소년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고꾸라진 것은 그 자신이었다. 바닥에 코를 처박은 남자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얼굴에 내달리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 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세상이 핑핑 돌아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제 남자의 눈에는 소년의 헤어진 운동화와 다리, 한 손에 든 근처 슈퍼마켓의 봉투 밖에 없었고, 위에서 들려오는 소년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엉성한 주먹이네요. 이런 주먹으로 무슨…….”

 

남자의 이가 갈렸다. 엉성한 것은 맞다. 자신이 택한 것은 기술 같은 것은 아니고 어쩌다 쓸 만한 잔재주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아무렇게나 내지른 일격. 하지만 한 때는 챔피언의 문 앞까지 닿았던 자신이 이렇게 무시당하다니. 수치스럽고 분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 소년의 머리를 터트려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후거 버히게허!”

 

남자가 외쳤지만 턱이 아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부러진 이빨이 피와 함께 입 안에서 굴러다녔다. 소년은 소녀를 이끌고 유유히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마지막까지 고개를 돌리는 일도 없다. 그것은 철저한 무시. 그것이 남자의 속을 더 긁어놓았다. 차라리 놀린다면 이리 분하지도 않았으리라. 골목을 돌아 사라지는 소년의 뒤에 남자의 진부한, 그렇지만 끈질긴 외침이 남았다.

 

후힌하! 어은 한흐시 애가 후힌다!”

 

 

 

 

회사에서 온 전화에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10분 후, 남자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2. 依賴의뢰

 

연립주택은 작은 숲이 맞닿은 마을의 외곽에 있었다. 척 보기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목조 건물이지만 거기에 낡아 보인다는 의미는 없다. 특별한 건축 양식도 없는 단순한 직육면체 형태의 주택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건물의 견고함을 강조하는 듯 했다. 지붕이나 기둥, 용마루와 같은 부분들은 하나같이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해서 언제나 잘 관리되고 있음을 말해주었다. 주택의 앞마당에는 숲에서부터 들려오는 매미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여름의 태양이 있는 대로 가시를 세우고 있었지만, 주택을 둘러싼 숲은 기분 좋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 연립주택의 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 될까. 창백한 피부의 야윈 얼굴에 걱정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여자다. 어깨 위까지 친 푸석푸석한 머리를 하나로 묶은 것에서 그녀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해는 아직도 중천이었지만 시간은 벌써 져녁에 가까워 있었다. 곧 딸을 데리러 가야 했지만 아직도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기껏 시간을 내서 온 건데. 여자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여자의 이름은 수빈이었다. 그녀 자신은 언제나 흔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직장은 두 곳이었다. 낮에는 대형마트에서 계산원 일을 했고, 밤에는 술집에서 서빙을 했다. 학생 때 배움을 게을리 했기에 그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루에 4시간도 못 자면서 일을 해도 어린 딸과 함께 살아가는 데에는 항상 돈이 부족했다. 자신에게 들이는 돈은 줄일 수 있어도 딸에게 들이는 돈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다. 이렇게 잠깐 짬을 내서 나오는 것도 그녀에게는 과분한 일이었다.

그녀는 초조해 하면서도 다시 돈 생각에 빠져들었다. 빚은 있지만 아직 크지는 않다. 이번 일만 잘 풀리면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무슨 일이세요?”

 

한참 계산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느닷없이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과 자신의 딸 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은 소녀. 그녀는 한 눈에 그들이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빈은 작게 신음했다. 소년은 한 손에 식재료가 담긴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고, 소녀는 소년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기운 없이 늘어져 있었다. 과연.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지금 당신에게는 딱 어울리는 상대, 인가.

 

혹시 네가 치완 이라는 애니?”

 

수빈의 물음에 소년은 쓰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아, 손님이셨나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중간에 잠깐 일이 생겨서요.”

“아, 아니. 괜찮아.”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예의상 하는 말이었다. 수빈은 다시 한 번 시계를 본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택시를 타도 늦으리라. 추가금은 피할 수 없겠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우리 애를 맡아 줄 수 있겠니?”

“애요?”

 

소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익숙한 표정이었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인 자신에게 애가 있다고 하면 대부분 저런 표정을 하니까. 하지만 치완은 그 이상 질문 없이 수빈의 말에 귀 기울였다.

 

딸인데, 나이는 거기 있는 애보다 조금 어리고…… 애가 좀 산만해. 그래도 맡아 줄 수 있겠니?”

“혹시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야…… 최근 여자애들만 노리는 납치범이 있다니까 불안해서.”

“아, 그 일 말인가요.”

 

치완은 납득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수빈은 쉽게 이해해준 소년에게 안도하며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원래 같으면 내가 돌보고 싶지만…… 사실 그럴 여력이 안 되거든.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지만, 너는 돈을 적게 받는다고 들었으니까.”

“돈을 적게 받는 게 아니라 아직 조금 밖에 못 받는 거예요.”

 

아직 신참이니까요. 치완은 웃으며 말했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자신도 저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빈은 성실하게 일했지만, 자신의 일이 즐겁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까지나 자기를 이 비참한 현실에 가두어두는 족쇄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애는 내일 데리고 올게.”

“급하시면 오늘부터 맡아도 괜찮아요.”

“아니야…… 나도 한 동안 바쁠 것 같거든. 맛있는 거라도 같이 먹으려고 해. ……돈은 어느 정도 들까?”

“단순 경호는 하루에 5만원 받고 있는데, 어린애인데다 위험한 일도 없을 거 같으니까 하루 3만원으로 해 드릴게요. 선금은 5일치고, 5일이 지나면 데리고 가실 때 하루 단위로 더 주시면 되요.”

 

수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가격이 낮았다. 지금 애를 맡기고 있는 탁아소보다 쌀 정도였다. 그녀는 지갑에서 미리 뽑아둔 현찰을 15만원만 꺼내서 건넸다. 치완은 능숙하게 세어보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예, 잘 받았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잘 부탁할게요.”

 

마지막으로 수빈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종종 걸음으로 주택을 떠났다. 위험한 일이 없을 것 같다니,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지만 소년의 미숙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번 일만 잘 되면 된다. 수빈은 다시 한 번 곱씹었다.

그래. 이번 일이 내 인생의 반환점이야.

 

§

 

소년과 소녀의 집은 연립주택의 2층 오른쪽 끝에 있었다. 문 안쪽의 공간은 살풍경했다. 두 사람이 지내기에는 꽤 넓은 크기였음에도 냉장고와 전자레인지가 딸린 부엌과 식탁, 옷장을 빼면 거의 빈 공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것은 소년과 소녀의 취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모습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TV와 소파 정도는 놓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돈이 없어. 소년은 매일 피눈물을 흘리며 그 사실을 재인식하고 있었다. 먹을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고, 멋들어진 옷을 입을 수도 없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교복도 사실 이 동네를 전전하며 간신히 얻은 것이다. 아주 가끔은 ‘그 때’의 풍족한 생활이 그리워질 정도로 돈의 힘은 위대했다. 치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게 받고 많이 일한다.’

 

자신을 이 길로 끌어들인 사람이 했던 말이었다. 청부업에 단신으로 처음 뛰어든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철칙이라나 뭐라나. 그 말에 따라서 조금 전에도 아주 손해 보는 금액으로 일을 맡았던 거지만.

 

……정말 이게 맞는 걸까, 수아야.”

 

소년은 나지막이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소녀는 돈으로 복잡한 소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책가방을 현관 근처에 버려두고는 식탁에 가 앉았다.

 

배…… 고파.”

“진짜…… 너는 아무런 걱정도 없구나.”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거기에 불쾌한 감정은 없다. 오히려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것은 이 집에서, 그것도 단 둘이 있을 때뿐이다. 원래 소녀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입는 것도, 보는 것도, 무언가를 하는 것도. 모든 것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가 해주는 대로 살아왔다.

그것이 비록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삶이 지금의 소녀를 만들었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체념. 지금까지 소녀의 삶은 체념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런 사소한 요구도 그녀에게는 장족의 발전이었으며, 소년의 입장에서는 기쁜 일일 수밖에.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벌써 한 달이 다 되도록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들어오는 일이라고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달라거나 불륜의 뒷조사를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사실 이번에 맡은 일이 그가 맡은 일 중에서는 제일 건수가 큰 일이었다. 적지만 돈을 만져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소년은 뒤늦게 후회했다.

 

배…… 고파.”

“……그래.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치완은 하루 종일 굶어 주린 배를 울리며 식탁에 앉았다. 어쨌든 당장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니 한동안은 굶지 않아도 된다. 거기에 안도하면서 소년은 식탁 위에 비닐봉투의 내용물을 털어놓았다. 대부분은 통조림이나 가공식품이다. 몇몇은 단순한 식재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오이나 토마토 같은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소년은 요리를 할 줄 몰랐고, 소녀는 요리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니까. 불과 한 달 전 까지만 해도 그들의 걱정거리는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영양 불균형 따위를 걱정하게 되는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다.

 

냉동식품으로 한창 식사를 하는 와중에 소년의 주머니에서 단음의 벨소리가 울렸다. 부족한 살림에 사치스러웠지만 두 사람은 모두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 소년은 청부업이라는 직업상 휴대전화가 필수였고, 소녀는 소년의 보호를 받는 입장에서 항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두 사람의 휴대전화가 모두 최신형 스마트폰일 필요는 없었지만 이것은 두 사람이 ‘그들’에게서 도망쳐 나오고 들뜬 나머지 저지른 한 순간의 실수였다. 설마 이렇게까지 돈에 쪼들리게 될 거라고, 그 때는 생각지도 못 했으리라.

치완은 전화를 꺼내 액정을 보았다. 거기에 떠오른 것은 이제는 익숙해진 사람의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온화했던 소년의 표정이 종이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쳇. 소년은 방 전체에 울릴 정도로 세게 혀를 차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야!]

 

느닷없이 날아든 큰 소리에 소년은 전화기를 집어 던질 뻔 했다. 욕이 나올 뻔 했지만 앞에 앉은 소녀를 보고 억지로 참아냈다. 이 사람은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을 것 같구만. 생각하면서 소년은 다시 전화를 귀에 댔다.

 

왜요.”

[몰라서 묻냐? 너 오늘 일 받았지! 받았잖아! 분명 받았을 걸!]

“그런데요.”

[그런데요는 무슨 그런데요, 야! 내가 분명히 말했지! 일을 받으면 무조건 나한테 보고 하라고! 너는 말이야 도대체 예의라는 게 없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어디에 팔아먹은 건지……]

 

이러니까 하기 싫은 거라고. 소년은 멈출 줄 모르는 큰 소리 때문에 아픈 귀를 연신 후볐다.

마오라는 이름의 이 여자는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큰 소리 치고 다니는 소란스러운 청부업자였다. 이렇게 한국말이 유창한 사람이 중국인일 거라고는 아무리 소년이라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앞서 말했던 신참 청부업자의 철칙이라는 것도 이 여자가 한 말이다.

치완은 이 여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망신창이가 되어서 이 마을까지 흘러들어 왔을 때 도와준 것이 바로 이 여자였다. 청부업자라는 직업을 권유하고, 이렇게 살 수 있는 집을 알선해 준 것도 이 여자다. 마오는 소년과 소녀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도의적으로 생각하면 이 여자에게 막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시끄럽잖아.”

[그러니까 나는…… 응?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래? 그럼 됐고. 하여간에 말이야, 나는 너에게 청부업을 권유한 사람이라고. 너는 그걸 받아들였고. 쉽게 말하면 난 너의 선생님인 셈이지.]

“어째서 그렇게 되는……”

[그러니까! 나에게는 책임이 있어. 제자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게 이끌어 줄 책임 말이야. 나는 너보다 강해. 너보다 경험도 많고 아는 것도 많아. 그러니까 너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보이는 법이라고. 그래서! 내가 감수를 하는 거지. 네가 맡은 일을 말이야.]

 

마오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자신 보다 강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경험과 지식이 많은 것은 확실하다. 청부업은 정보전이다. 자신이 가진 무기와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상대보다 한 발 늦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래서 노련한 청부업자들은 자신이 믿을만한 정보원을 몇 명이나 만들어 두는 것이 보통이고, 만들지 못하는 자는 도태되기 마련이다. 새내기인 치완이라도 오랜 시간 청부업을 해온 마오라면 분명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는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리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일의 뒤를 보아 주는 거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정보를 얻을 수는 없어도 보험은 된다.

이러니 이 사람의 전화는 아무리 싫어도 받을 수밖에 없다.

 

……알았어요.”

[오, 진짜로? 정말이지! 자식, 진작에 그럴 것을 말이야 괜히 입만 아프게 하고. 너 정말 다음에 또 이러면 감수고 뭐고 없는 줄 알아! ……하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내가 혹시라도 사랑하는 제자를 버릴 것 같아? 으응? 설마 쫄았어? 너, 화끈하게 일을 벌이고 도망친 주제에 이런 건 무서운가 보지?]

“지금 말합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언제까지 말할지 모른다. 그런 판단에 치완은 큰 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라버리고는 이번에 맡게 된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여자가 주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괜찮다고 했지만 많이 바빠 보였던 것. 그녀가 최근 TV에 자주 나오는(TV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지만) 여아 납치범에게 딸이 해를 입을까 걱정하는 것. 그 일을 맡은 선금으로 15만원을 받은 것. 별로 말할 것도 없었지만 소년은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는 사이 소년이 먹던 햄버그 도시락은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소녀는 무심하게 제 것만 다 먹어버리고 거실로 가 앉았다.

설명은 다 들은 마오는 으음~, 하고 이상야릇한 소리를 냈다.

 

[수상하군.]

 

마오가 옛날 영화에 나오는 유럽풍 탐정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말했다.

 

뭐가 수상하다는 거예요?”

[일단 말이야, 잘 생각해 봐라 멍청한 제자야.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은 요즘 세상에 널리고 널렸어. 그 여자의 혈연관계까지는 모르겠지만 친척이 있다면 친척에게 잠깐 맡겨도 되고, 돈은 좀 들겠지만 탁아소에 맡겨도 돼. 여러 가지 방법이 더 있겠지만 하여간에 자기 자식이 위험하다고 해서 통성명도 안 하고, 영수증도 끊어주지 않는 무명 청부업자한테 맡기는 부모가 있을까?]

“그 여자는 제가 싸니까 찾아왔다고 했어요.”

[물론 싸기는 하지.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적게 받고 많이 일한다는 말도 있지만…… 하루 3만원은 나 같으면 절대로 안 할 짓이야.]

“그래요?!”

[그야 당연하지. 어린애라도 사람 하나 맡고 있는 게 얼마나 큰일인 줄은 알아?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식비만 하루 3만원은 될 것 같은데. 그럼 완전 공짜잖아.]

 

소년의 가슴에 후회가 파도처럼 닥쳤다. 역시 너무 싸게 가격을 잡은 거였어. 치완은 피눈물을 흘렸다. 그런 소년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아는 거실에 가만히 앉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근데 사람 심리라는 게 말이야, 싼 게 비지떡이라고 가격이 너무 싸면 믿지를 못 하거든? 차라리 공짜면 속는 셈 친다고 하지만, 이렇게 가격도 싼데 자기 자식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다 한다니, 말이 너무 그럴 듯 하지 않아?]

 

소년의 입가에서 신음 비슷한 것이 떠돌았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당장 자신도 수아를 같은 조건에 맡기라고 하면 절대 맡기지 않으리라. 미심쩍으니까.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가 없으니까. 수아를 맡긴다면, 물론 자신이 있는데 누구에게 맡기겠냐만은, 무리를 해서라도 돈을 끌어 모아 믿음직한 경호업체에 맡길 것이다.

하지만 아까 만난 여성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최소한의 망설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몇 가지 물어보는 것도 없이 그냥 아이를 맡겼다.

 

……그러고 보니 소개를 받고 왔다고 했는데, 제가 아니라 소개해 준 사람을 믿는 게 아닐까요?”

[음? 아, 응. 소개? 소개…… 그렇구나. 소개를 해준 사람이 믿을만 했기 때문에 믿고 맡겼다, 있을 법한 일이야. 너를 소개해 줄 만한 사람이 있는지가 더 의혹으로 불거지지만 말이야.]

“저도 착실하게 일하고 있거든요!”

[그래. 학생은 학교에 다니는 게 일이지.]

“더 할 말 없으면 끊을게요!”

[벌써부터 한참 어린 여자애나 후리고 다니고 말이야.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이 선생님은 우리 치완이가 일탈할 때마다 가슴이 너무너무 아프답니다.]

“정말로 끊습니다!”

[하하하하하.]

 

소년은 전화를 끊기 위해 전화를 내렸다. 얼마나 전화를 했던 건지 액정에 옅은 물기가 있다. 스피커에서는 아직도 자지러질 듯 웃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누구 하나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고, 도시락은 식다 못해 파리가 꼬이기 시작했다. 처량하구나, 내 인생. 소년은 빨간 버튼에 손가락을 대었다. 전화가 끊기기 직전에 전화 너머에서 희미한 마오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조심하라고, 애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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