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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 397   162 hit   2018-05-21 08:25:55
[즉흥단편] 목각인형의 신 /2018-05-21
  • User No : 5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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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Vector To The Heavens - Yoko Shimomura

 

 

 

 

#1

 

누군가가 목각인형을 만지며 자세를 바꾼다. 

 

"이 자세로 해볼까?"

그들은 몇번이고 몸의 형태를 바꾸고 나서, 뚫어지고 쳐다본다.

몇 시간 동안 그것만 반복된다. 

 

 

 

마네킹언니! 매일 자세를 바꾸고 사는게 너무 힘들어요.

마네킹 언니는 좋겠어요. 예쁜 자세가 정해지면 한달은 가니까! 

 

 

마네킹은 미안한듯 웃으면서 목각인형을 달랜다. 

 

우리들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단다.

목각인형부터 시작해서 나와 같은 마네킹,

동상, 바비돌, 허수아비, 인체 실험 더미까지 말이야. 

 

우리는 형태가 정해져있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란다.

이 의미에는 가치를 매길 수가 없어.

우리의 존재는 의미를 부여받고 태어난 것이지.

이런 의미에, 가치란 매겨질 수 없단다. 

 

애초에, 난 목각인형인 네가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것이라서,

목각인형이 마네킹보다 의미가 큰 것이고, 더 큰 가치가 더 있어. 

 

 

하지만 비겁해요.

마네킹들을 위한 옷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네킹 언니은 매일 예쁜 옷을 입고 지내잖아요.

나는 언제나 헐벗은 몸이었어요.

아무것도 나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었어요. 

 

 

목각인형아. 그거 아니?

사실 너와 나는 크기에 차이가 있을 뿐, 큰 차이는 없단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인형이었어. 용도가 나뉘어졌을 뿐이지.

언젠가부터 우리가 이렇게 달라졌지만, 항상 우리는 같아. 

 

 

나도 옷을 입고 싶단 말이에요! 

 

 

하지만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나의 옷이 아니야.

사람을 위해 입고 있는 것이지.

언젠가 이 옷도 사람에게 돌아갈거야. 

 

 

마네킹 언니. 나는 동상이 되고 싶어요.

자세 한번 안고치고 많은 사람들의 영웅이 되고 싶어요.

그럼 귀찮게 자세를 고치지 않아도 되고 옷을 뺏길 일도 없을거 아녜요.

이 몸으론 아무리 노력하고 몸부림쳐도, 아무리 시선을 받아도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아요. 예뻐질 수 없단 말예요...

 

 

 

 

 

#2

어느날 매장이 비워지고 마네킹이 옮겨진다. 

 

 

 

마네킹 언니! 어디가세요? 

 

 

옷가게가 다른 매장으로 옮겨지는 것 같아.

마네킹도 새로 들어온대. 기대되지 않니? 

 

 

흥... 좋겠네. 다른 마네킹이 생기면 나같은건 생각도 안나겠네. 

 

 

호호. 넌 그 작업실에서만 사니까 이사갈 일 없어서 좋겠구나.

우리는 사람이 입는 옷을 선전하기 위해 가게에 전시되어야만 하니까.

이럴 땐 조금 불편하지만~ 

더 화려한 옷을 입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는걸. 

 

 

마네킹 언니는 여전히 많은 것을 아시네요! 

 

 

그야 밖을 보고 많은 사람과 마주하게 되니까.

사람을 접하게 되고. 점점 그들을 알게 되는거지. 

 

 

아 맞다. 나도 여기를 잠깐 나가게 됐어요.

여기 작가가 그렇게 말했어요. 작업실도 옮길거라고.

안그래도 목각인형도 어깨 관절이 녹슬어서 잘 움직이질 않으니

조치가 필요하다고. 

 

 

우와! 정말이니? 우리 또 만났으면 좋겠다.

난 목각인형 네가 있어서 너무 행복했단다. 

 

 

 

 

 

#3

가방에서 꺼내어진 목각인형은 푸른 하늘 아래 동상 앞에 놓여졌다. 

 

 

 

동상아저씨. 머리에 구멍이 났다면서요? 

 

 

음... 머리에도 났고. 다리에도 났지. 온몸이 구멍과 금 투성이네.

곳곳에 때와 부식으로 되서 엉망이야. 

 

 

동상 아저씨는 좋으시겠어요. 불편하게 자세를 바꾸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요. 불편한 자세를 분단위로 바꾸어가며 알몸으로 응시당해야만 해요.

동상 아저씨는 그렇게 멋진 자세와 옷으로 영원히 사람들의 선망을 받죠.

아까 이곳을 '청소'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때가 묻으면 관리도 해주고.

나는 하도 많이 움직이다보니 점점 관절이 너무 뻑뻑해져서 너무 힘들어요.

동상은 나의 우상이에요. 목각인형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저는 아저씨와 같은 동상을 기도해왔어요. 

 

 

하하... 꼬마야. 의식이 흐려지니 네게 마지막으로 털어놓겠다. 

 

 

...? 털어놓는다니요? 고민이요? 

 

 

내 머리에 구멍은 사람이 낸 것이다.  나는 거의 수명을 다했어. 

 

 

...! 

 

 

지금 네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곳에 새로운 동상이 세워지기 때문이란다.

나는 철거되어 부서지고, 다시 쇳물이 되어 어딘가로 사라지겠지.

넌 새로운 동상의 디자인을 구상하도록 만드는 목각인형인가 보구나. 

 

 

아... 

 

 

시대가 바뀌었어. 나는 어떤 영웅의 동상이란다.

지금은 그것이 악인이 되었지.

하지만 나는 얼굴을 바꿀 수 없었어. 옷을 바꿀 수 없었어.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부터 이곳에서 계속 지내왔지.

나의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어. 

 

누군지도 모를 이 남자의 몸과 의상으로. 명예로. 영원을 기리며.

난 태어날 때부터 이 자세, 이 모습을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해.

지금처럼 영웅에서 악인으로, 타락해서 온몸에 구멍이 뚫릴 때 까지.

어쩌면 영원한 영웅의 화신이 되어, 

이 구리 몸통에 금이 나서 부서질때까지.

지금 이 시대, 장소가 아니면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는 한정된 삶. 

 

그러나 너는 달라. 아무리 시대가 흘러도, 어디에서도,

사람이 있는 한. 사람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너는 존재하겠지.

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날 기만하지마. 

 

 

난...!

하지만!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목각인형아. 이 옷은 나의 옷이 아니야.

우리는 사람의 옷에 의해 태어났지만, 우릴 위한 옷은 어느 곳에도 없어. 

 

 

그래요... 난 한번도 내가 입을 수 없었던 그 옷을 위해서...

언제까지나 자세를 고쳐가며 살 수 밖에 없어요. 

 

 

나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란다.

그리고 목각인형아. 너는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란다. 

 

 

그럼 만약 제가 움직일 수 없다면요? 동상 아저씨가 움직이게 된다면요?

더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어지나요? 존재할 가치가 없어지나요? 

 

 

그럴 리는 없겠지... 신이 그렇게 만들었을테니까... 

 

 

 

 

 

 

#4

"이제 팔이 움직이지 않네..." 

 

목각인형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날이 갈수록 목각인형 위로 쓰레기가 덮여지면서 어두워진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암흑이 며칠 지난 후, 불꽃이 쓰레기 속을 밝혔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긴... 5000원짜리 목각인형을 고쳐 쓸리가 없지... 

 

 

불꽃이 사방을 밝히면서 멀리서 무언가가 선명하게 모습을 보였다.

부서진 마네킹의 팔이었다. 

 

 

마네킹 언니? 

 

 

...마네킹 언니! 마네킹 언니! 

 

 

마네킹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부서진 그것은 다른 마네킹의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팔만 남아서 들리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맞아. 마네킹은 나보다 비싸니까.

팔만 망가졌다고 금방 버려지곤 하지 않을거야.

그래. 마네킹 언니는 팔만 버려진거야. 

분명 나에게 만들어진 옷을 입고

비싼 매장에서 예쁜 옷을 입고 즐거워할걸. 

 

 

멀리서 마네킹의 팔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은 점차 목각인형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목각인형은 동상아저씨를 떠올리며 말했다. 

 

 

맞아요. 동상아저씨.

마네킹 언니는 우리가 같은 종류의 인형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이미 나와 다른 존재였어요.

처음엔 같았을지 몰라도... 이젠 너무 다른걸요. 

 

 

목각인형은 자신의 몸으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이제 겨우 알았어요.

우리는 사람의 손에 만들어졌지만.

그들은 우리의 신이 아니에요...

만약 신이 있다면... 

 

 

하지만 신이 없더라도 난 기도할거에요. 

 

 

그래도 만약, 정말로, 신이 있다면.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에요.

나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그래요. 사람이 아닌, 목각인형의 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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