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야 복이 온댔다. 빌어먹을.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 망할 놈의 대중매체들은 웃지 않는 사람들이 중죄라도 짓는 것 마냥 웃는 것을 강요한다. 그들의 말에 나는 콧방귀를 날려 줄 뿐이다.
오늘 촬영지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내가 잘 나가는 배우였다면 매니저가 차를 태워 가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무명 단역 배우일 뿐이다. 돈도 없고 인기도 없는 배우는 대중교통이 최고다.
버스를 타면 항상 서서 가야 한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승객이지만 대부분 지하철역을 향하는 사람들이기에 버스에는 내 자리가 없다. 나는 버스 뒷문 바로 옆 자리에 서서 자리를 잡는다. 앉은 사람을 보니 청초한 미인.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그녀는 창밖을 보고 있다. 손은 가지런히 무릎 위에. 세상에 아직도 이런 사람이 남아있나 싶었다.
실례인줄도 모르고 한참동안 그녀를 훔쳐보고 있자니 어느새 지하철역이다. 뒷문 앞에 서서 내리려고 하는데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우아한 몸짓에 나는 또 다시 시선을 뺏겼다.
지하철역을 향하는 동안 그녀를 찾아봤지만 인파에 휩쓸려 놓치고 말았다. 아깝지만 나는 발길을 재촉한다. 잠시 기다리면 지하철이 들어온다. 파도에 몸을 맡기듯 가만히 있으면 어느새 나는 지하철 안에 있다. 출산율이 낮아진다는데 사람은 어째 가면 갈수록 더 많아지는 것 같은지.
나는 가까스로 내 자리를 잡았다. 앉아서 간다는 그런 운 좋은 소리는 아니다. 서서 가더라도 편한 자세가 있는 법이다. 나는 ‘운이 좋다’는 말을 이럴 때 쓴다. 것 봐, 안 웃어도 복은 오는 법이다.
그리고 양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좀 덜 끼치려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내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그녀가 내 옆에 서서 버스에서처럼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나도 똑같이 바깥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 볼 수는 없었으니까.
오늘처럼 행복한 출근길은 없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역 이름을 알리는 방송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지하철에서 내렸다. 촬영장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날 보는 사람들 마다 오늘 표정이 좋다는 말을 건넸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그런 말이 싫지 않았다.
평소라면 대기시간이 지루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버스에서 지하철까지 짧은 시간 만끽했던 혼자만의 시간을 되새기며 나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불렀다. 오늘은 솔로인 주인공 곁을 지나가는 커플역인 만큼 이 기분을 가져가면 연기에도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쪽에 서서 짧은 대사를 혼자 연습하고 있는데 제작진 한 명이 날 불렀다. 오늘 상대역을 데려온 모양이다. 처음 보는 여성과 커플 역할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잘 될 것 같았다. 인사를 나누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그 예감을 확신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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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원래 대사 치는 걸 안 좋아합니다. 이번에 올린 글 모두 대사가 없는 건 그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모로 의문이 생기신다면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하지만 저는 의도를 숨기는 짓은 잘 못하니 괜찮으리라고 봅니다.
왠지 이 글 자체가 사족이 된 느낌도 들고...합니다. 네...
으흥 출근길 같이 한 그녀가 상대역인가보군요
흐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