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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 442   271 hit   2018-07-26 13:00:56
살아남은 악당, 죽은 영웅.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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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내기
    Lv10 배페인

 [현재 허수공간 터널 통과 중. 구역 E1004297 진입까지 약 45초 남았습니다.]

 

 에스는 경고음을 듣고 몽롱한 머리를 흔들며 계기판을 쳐다보았다.

 

 벌써 36회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도착하기까지 느끼는 정신적인 이물감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다. 유리창 하나 없는 꽉 막힌 통조림 같은 이 코핀의 구조 때문인지도 몰랐다. 광자조차도 조금이라도 유출되면 외부와 ‘얽히게’ 되어 영영 벗어날 수 없다던가? 에스는 열띤 목소리로 주의할 점에 대해 설명하던 기술자의 말을 떠올리려 했으나,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아 이내 떠올리려는 것을 포기했다.

 

 [진입까지 10초 전.]

 

 에스는 코핀 내부를 온통 붉게 물들이며 점멸하는 경고등을 보고, 반사적으로 안전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이 다가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3초.]

 

 에스는 다가올 무언가에 대비하며 머리를 크게 흔들고 마음을 다잡았다.

 

 [2초.]

 

 문득 에스는 자신이 까먹은 것이 없는지 궁금해졌다. 나노슈트의 전원을 점검했던가? 보고서를 통해 받았던 시공 좌표가 코핀의 계기판과 일치했던가?

 

 [1초.]

 

 나노슈트의 생체 보안을 언제 재설정했더라? 에스는 1초 안에 잊어먹은 것이 없는지 꼭 확인해놓고 싶었다. 왜냐하면-

 

 [0초.]

 

 코핀 내부가 부들부들 떨리는가 싶더니 에스의 시야가 흔들리며 코핀 내부가 흐물흐물하게 흩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에스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으나, 코핀과 뒤엉키며 어디까지가 손이고 어디까지가 코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곧 에스와 코핀이 뒤엉킨 그 무엇은 물결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허수공간 내부를 떠돌아다니다가 서로 간섭하며 약해지고 강해지기를 반복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에스는 높고 날카로운 경고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코핀의 위상이 확정되었습니다. 평행 도약 드라이브 이상 무. 중앙 제어 시스템 이상 무. 시공 좌표와 현 위치를 대조합니다. 연산에 시간이 걸리오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이상 무. 탑승자 생명활동 이상 무. 탑승자…….]

 

 고막을 찌르는 소리와 무기질적인 기계 음성에 에스는 깨어났고, 계기판을 더듬어 경고음을 해제했다. 의식이 각성하자마자 끔찍한 두통이 몰려왔다. 에스는 머리를 흔들며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러 통증을 가라앉혔다.

 

 어느 정도 두통이 가시기 시작하자 에스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조종석의 벨트가 풀리지 않아 곧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짜증이 나서 미간에 주름을 잡은 에스 앞에 홀로그램 안내문이 띄워지기 시작했다.

 

 [기억 점검 및 재생 프로그램을 시작하겠습니다. 위 프로그램은 3문항으로 이루어져있고, 허수공간 영역의 여행이 낳는 부작용을 완화시키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생체 스캔을 시작합니다.]

 

 곧 녹색 불빛이 에스의 몸을 핥듯 위에서부터 더듬어나가기 시작했다. 에스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가만히 기다렸다.

 

 [장기 활동 정상. 뇌세포 손상 감지되지 않음. 골절 및 타박상 감지되지 않음. 정신 감정을 시작합니다.]

 

 “…….”

 

 에스는 조종석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며 인공지능이 말을 마치길 기다렸다.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십시오.]

 “제……. 집어치워. 이번으로 37번째라고. 그냥 에스라고 하면 알아듣잖아?”

 [당신의 현 위치를 말해주십시오.]

 “2325년 확률변수관리국 본부 지하. 20년 후의 미래 맞지?”

 [당신의 임무를 말씀해주십시오.]

 “계엄군이 시민에게 발포해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 저지하는 것. 보고서에 따르면 e안인 총통의 암살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겠지.”

 [구속을 해제합니다.]

 

 에스는 허리의 벨트가 해제되자마자 크게 기지개를 펴며 몸을 이완시켰다. 당장이라도 나가서 맑은 공기를 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에스는 코핀의 문을 열기 전에 가슴을 손가락으로 짧게 두 번 두드렸다. 곧 저장된 나노 봇들이 에스의 몸을 부드럽게 휘감으며 퍼져나갔다. 장착이 완료되자 에스는 나노 슈트의 걸리적거리는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문을 나가면서 에스는 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고, 손가락 끝에 응집된 나노 봇들이 작은 인이어 교신기를 이루며 에스의 귀에 장착되었다.

 

 코핀의 문이 열리면서 에스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쾌적하고 맑은 공기를 기다린 에스였지만,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가 와 닿자 놀라서 얼굴을 찌푸렸다. 불쾌함에 입가가 뒤틀린 에스는 어둡고 낡은 지하실을 둘러보았다. 군데군데 곰팡이가 끼고 녹슬어 있어 오랫동안 방치된 것이 분명했다.

 

에스는 잡음만 수신하는 교신기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어이, 들려? 들리나?”

 

 치지직거리던 잡음에 곧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했고, 곧 잡음이 잦아들며 똑똑히 들리기 시작했다.

 

 “에스, 들려요? 무사한 거죠?”

 “어, 그래. 교신도 이상 없는 것 같구만.”

 “기억은 온전한가요? 몸도 이상 없죠? 혹시 어딘가…….”

 “그쯤 해둬. 이상이 있었으면 코핀에서 나오지도 못했겠지. 말하는 게 꼭 우리 할머니 같아.”

 

 에스의 신랄한 말을 끝으로 교신기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잡음만 내뿜기 시작했다. 에스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실소를 흘리며 듣고 있을지 모를 여자에게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셀리, 내가 잘못했어. 거길 통과하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내가 좀 날카로웠던 거 같아. 셀리나, 듣고 있지? 셀리나?”

 

 에스의 표정이 심상찮아지며 귀의 교신기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이런, 채널이 또 먹통이 됐잖아! 셀리나, 셀리나?”

 

 곧 잡음이 잦아들며 여자의 웃음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에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장난은 네가 제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당신한테 배운 거예요.”

 “윗선에 통신기록 보고할 때 자를 부분 많아진다고 싫어한 건 너였잖아?”

 “그런 건 어차피 일 끝나고 하면 되니까 나중에 생각하죠.”

 “그것도 나한테 배운 건가?”

 “그런 셈이죠.”

 

 교신기 너머로 에스와 셀리는 서로 가볍게 웃었다. 코핀 안에서부터 줄곧 쌓여 있던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것을 에스는 느낄 수 있었다. 스무 번 넘게 임무를 함께 하면서 에스만 셀리에게 적응한 것이 아니라, 셀리도 에스를 다루는 법을 터득했다.

 

 에스는 어깨를 가볍게 한 번 풀고, 셀리에게 말했다.

 

 “이제 일 해야지. 타겟 위치는 나왔어?”

 “네. 확률변수관리국 15층 총괄집무실에서 앞으로 3시간 23분 동안 머물러 있을 거예요. 발포 명령까지는 2시간 17분 남았습니다. 건물 내부 구조는 크게 바뀐 게 없을 거예요. 다만, 보안이랑 경비 병력은 주의하셔야 해요. 그 나노 슈트는 잠입과 암살용이어서 방호력은 기대할 게 못돼요. 전면전은 최소한 피하셔야 할 거예요.”

 

 에스는 셀리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노 슈트의 스텔스 모드를 기동했다. 곧 메타 물질이 에스의 몸을 둘러싸며 빛을 투과시켰다. 냉매가 에스의 몸을 한 바퀴 휘돌며 열적외선 감지를 차단하자, 에스는 치밀어 오르는 냉기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우리가 맨날 출근하고 일하는 곳에서 임무를 한다니 기분이 이상하군. 혹시 몰라, 관제실로 가보면 네가 아직도 같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을지?”

 “일을 처리하고 그럴 여유가 되시면 한 번 가보시든가요. 뭘 하시건 5시간 내에 끝내고 코핀으로 복귀하셔야 할 거예요. 그나마 코핀에 타서 재전송되는 게 그냥 맨몸으로 허수공간을 통과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요.”

 “충고 고맙군.”

 

 에스는 눅눅한 지하실을 나섰다.

 

 

 

 

---

 

 

 

 

 복도는 여러 과학자와 가볍게 무장한 경비 병력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조심히 동태를 살피던 에스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인적이 드문 구석에 몸을 숨기고 교신을 시작했다.

 

 “이거, 경비병들은 경무장이라 내가 예상한 것보다는 일이 수월해지겠는데? 그래도 전력 문제 때문에 계속 스텔스 상태로 잠입할 수는 없을 테니 위장해서 들어가야겠어. 나노 슈트가 경비들 복장을 스캔했으니까 눈속임은 될 거야.”

 

 셀리는 회의적인 목소리로 에스에게 말했다.

 

 “연산 결과랑 슈트에서 보내온 정보로 분석한 결과, 총괄 집무실은 경비병들의 슈트가 발산하는 특정 신호를 스캔하지 않으면 진입할 수가 없어요. 경비병 한 명에게서 신호기를 탈취해야 할 거예요.”

 “의외로 그런 부분은 그대로군. 살상은 안 된다고 했던가?”

 “네. 이번 임무에서 허락된 사상자는 오직 총통 한 명뿐이에요. 다른 인명을 살상했다가는 그 구역의 위상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또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나?”

 “경비병들의 생체 신호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중앙 관제 시스템에 신호가 가고 경보가 울릴 거예요. 그 센서는 아마 슈트의 목 뒤에 달려있을 거예요. 슈트를 탈취할 때 그 부분을 먼저 고장 내셔야 할 거예요.”

 “목 뒤의 센서가 부서질 정도의 충격을 가하면서 죽이지 않고 제압하라고?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나보지?”

 “그런 부분을 어떻게든 하는 게 당신 전문 아닌가요?”

 

 에스는 셀리의 능청스러운 말을 듣고 실소를 흘리며 복도로 나섰다.

 

 에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길이 조금씩 있는 것으로 보아 20년 사이에 크게 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에스는 익숙한 걸음으로 아는 모퉁이를 몇 번 돌고, 화장실 쪽으로 향하던 경비 두 명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에스는 경비병들이 화장실로 들어가길 기다렸다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움직였다. 팔을 뒤덮은 나노 입자들이 에스의 손바닥에서 응집되며 짧은 막대를 형성했다. 에스가 막대를 한번 까딱하자, 막대의 끝부분부터 나노 입자들이 깎여나가며 날카로운 외날 나이프가 되었다.

 

 에스는 조심스럽게 나이프를 눕혀 날 면을 두 손가락으로 잡아 쓸어내리며 예리함을 확인하고, 화장실 안으로 돌입했다.

 

 “이번 시위는 좀 오래 가는데……. 비상이 벌써 며칠째 이어지는 거야? 이젠 칼로리메이트만 봐도 신물이 날 것 같아.”

 “어차피 곧 주동자가 잡힐 거야. 그러면 저 사람들도 쓸모없는 짓인 걸 알고 곧 돌아가겠지. 먹고 살기도 팍팍할 사람들이니, 일터를 하루만 비우는 것도 생계에 영향을 줄걸?”

 

 두 경비가 소변기에 서서 나란히 소변을 보며 잡담하고 있었다. 에스는 빈 소변기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움직일 시간을 기다렸다. 곧 두 경비가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뒤처리를 하자, 에스의 손에 있던 나이프가 사라졌다.

 

 턱!

 

 두 경비는 거의 동시에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새까만 외날 나이프가 벽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에스는 은신을 해제하고 가까이 있는 경비의 목을 뒤에서 휘감아 졸랐다. 목이 졸려 꺽꺽대는 동료의 소리를 듣고 다른 경비가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에스가 가슴팍에 발을 꽂아 넣자 순식간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엎어진 경비가 기절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에스는 슈트를 그 자세로 고정시키고 착용을 해제했다. 에스는 일어나려던 경비를 빠르게 내리쳐 완벽하게 기절시키고, 나노 슈트 껍질에 목이 졸리고 있던 경비의 명치를 쥐어박아 졸도시켰다.

 

 “와우.”

 

교신기 너머에서 셀리의 숨죽인 감탄사가 들렸다. 에스는 아랑곳 않고 나노 슈트를 재장착하고, 두 경비의 기절한 몸을 끌어다가 좌변기가 있는 칸에 집어넣었다.

 

 “언제 봐도 깔끔하네요. 어떻게 뒷목에 있는 센서를 나이프 한 번 던져서 두 개나 절단 내셨을까?”

 “궁금하면 나중에 가르쳐줄까?”

 “사양할게요.”

 

 에스는 벽에 박힌 나이프를 쥐었고, 나이프는 다시 나노 입자로 분해되며 에스의 슈트로 스며들어갔다. 다시 스텔스 모드를 켠 에스는 두 경비가 있는 칸으로 들어갔다.

 

 에스가 경비의 슈트에 손을 대자, 곧 나노 슈트가 스캔을 시작했다. 동시에 에스의 슈트가 실시간으로 재구성되며 경비와 똑같은 복장을 띄었다.

 

 “에스. 경비들 슈트에서 이상한 장치를 발견했는데, 그건 복제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순조롭게 경비의 복장을 복제하던 에스의 귀에 셀리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셀리에게 물었다.

 

 “그게 뭔데?”

 

 셀리는 계속 망설이다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에스에게 말했다.

 

 “음, 어……. 그 경비용 슈트의 등판 한가운데에 있는 장치는 외부의 특정한 신호를 수신해서 동방결절에 전기 자극을 주도록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위에서 원격으로 이 녀석들의 심장을 멈출 수 있다는 말이군.”

 

 에스의 입에서 나온 싸늘한 결론에 셀리는 말을 잃었다. 에스는 말없이 슈트를 조작해 그 소름끼치는 장치의 생성을 멈추고 외양만 모방해 장착했다.

 

 “…… 조심해요. 그 총통이란 사람은 우리 생각보다 더 끔찍한 인물일 수 있어요.”

 

 염려하는 셀리의 말을 들은 에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흠, 우리 윗대가리들도 어지간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녀석은 그런 수준을 벗어났군.”

 “…… 방금 건 또 잘라야겠네요.”

 “잘 부탁해. 그런 부분을 어떻게든 하는 게 네 전문이잖아?”

 

 에스는 질책하는 셀리의 말에 능청스럽게 대답하고는 화장실을 나섰다.

 

 

 

 

---

 

 

 

 

 에스는 교대하는 경비들 틈에 섞여 15층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밖에 시위대가 결집해 있어 비상이 걸려 있다고 했지만, 내부의 경비들은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에스가 생각한 만큼 경계가 철저하지 않았다.

 

 15층 입구에는 역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차폐막이 있었다. 경비병들은 차폐막을 통과하기 전에 슈트의 가슴팍을 두 번 두드렸고, 곧 차폐막의 일부가 열려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에스는 차폐막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나노 슈트의 복제에 문제가 없기를 다시 한 번 기도하면서, 에스는 가슴팍을 두 번 두드렸다.

 

 다른 경비에 비해 조금 오랜 시간이 걸리자, 에스는 식은땀이 흘렀다. 에스는 5초 안에 차폐막이 열리지 않으면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물론 차폐막이 경보를 울리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에스가 속으로 3초까지 셌을 때, 차폐막이 둘로 갈라지며 시원스럽게 에스에게 길을 내주었다. 에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차폐막 내부로 진입했다.

 

 15층은 다른 층보다 공간이 넓었고, 무엇보다 쾌적했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도 많았다. 에스는 돌아다니며 엄폐물로 쓰거나 몸을 숨길만 한 것들이 있는지 훑어보았지만, 곧 전투가 일어나게 되면 크게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는 오와 열을 맞추어 순찰을 도는 경비 무리의 경로를 주시했다. 한 그룹당 여섯 명 정도이지만, 이런 엄폐물 하나 없는 개활지에서는 여섯 명도 에스를 벌집으로 만들기엔 충분했다. 에스는 경비 무리를 따라 넓은 복도로 들어갔다.

 

 에스는 복도로 들어가자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복도가 내뿜는 분위기는 15층 전체와 동떨어져 있었다. 높은 천장에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고, 길을 따라 2미터 정도의 대리석 조각상이 줄지어 서 있었다. 복도 끝에는 크고 고풍스러운 떡갈나무 문이 있었고, 문 옆에는 외골격 아머로 무장한 경비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에스는 저 곳이 총괄집무실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목표를 어느 정도 파악한 에스는 의심을 받기 전에 몸을 돌려 복도를 빠져나왔다.

 

 다행스럽게도 외곽으로 갈수록 인적이 줄기 시작했고, 주변에 충분히 사람이 적다고 판단한 에스는 다시 교신을 시작했다.

 

 “셀리. 나도 전투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데, 좋은 계획 있어?”

 “그래도 복도는 엄폐물이 있다는 게 다행이네요. 복도 앞의 경비병들이 쓰는 장비가 뭔지 해석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총통이 가까이에 있으면 고화력을 내는 무기는 쓰지 못할 거예요. 교전이 1분 이상 이어지게 되면 순찰을 도는 경비들이 바로 알아챌 거고, 병력이 증원되겠죠. 그렇지 않더라도 교전 과정에서 큰 소란이 일어나면 병력이 또 증원될 거예요.”

 “전투를 피하고 싶다는 말, 못 들었어?”

 “죄송해요. 하지만 전투 없이 저길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요. 광장에서 큰 소란을 일으켜 시선을 끈다 해도 집무실 앞을 지키는 정예병들을 끌어낼 수는 없을 거예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줘.”

 

 에스는 나노 슈트에서 나이프를 생성해 내고, 손 안에서 가볍게 휘돌리며 명상에 잠겼다. 차가운 칼날이 손에 닿자, 에스는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에스는 다시 한 번 파악한 정보를 정리했다. 무엇을 하건 광장에서 교전하는 것은 에스에게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교전은 복도에서 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중무장한 경비병에게는 에스의 지금 장비로는 피해를 입힐 수 없다. 복도에서 교전을 1분 이상 끌면 지원이 도착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큰 소란이 일어나면 지원이 오게 된다. 에스의 머리는 얽히고설킨 문제들을 찬찬히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곧 에스의 머릿속에 지금 상황을 타개할 계획의 윤곽이 잡혀나갔다. 에스의 사고가 가속하며 계획에 살과 근육을 덧붙이기 시작했고, 곧 숙고를 끝낸 에스는 손에 쥔 나이프를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변형이 끝나고 에스의 손에 들린 것은 와이어 형태의 줄톱이었다.

 

 “셀리, 이번 건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내 생체반응이 끊기면 시간이 얼마나 남았든 곧바로 회수해.”

 

 에스의 냉정한 말에 셀리는 놀라서 에스에게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임무가 불가능할 것 같으면 그냥 코핀으로 돌아가세요! 당신이 지금 후퇴해도 아무도 책망하지 않는다구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잖아. 이번 시기를 놓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아. 그리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디까지나 만약을 가정한 거야. 나도 이런 곳에서 죽긴 싫다고.”

 

 셀리는 에스의 말에 흥분을 가라앉혔다. 셀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흔들림 없이 에스에게 말했다.

 

 “…… 반드시 멀쩡히 돌아와요. 당신은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에요.”

 

 에스는 셀리의 걱정에 코웃음을 치며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그 모두란 놈들도 내가 잘 부수고, 죽이니까 필요로 하는 거지. 이런 짓밖에 할 줄 모르는 녀석을 또 누가 필요로 하겠어?”

“…… 저도 당신이 필요해요.”

 

 에스는 셀리의 간절한 목소리를 듣고 잠시 굳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말문이 막힌 에스는 작은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윽고 마음을 진정시킨 에스는 낮은 목소리로 간결하게 말했다.

 

 “안심하라고. 꼭 돌아갈 테니까.”

 

 

 

 

---

 

 

 

 

 에스는 슈트의 스텔스 모드를 활성화시키고 대리석 조각 뒤에 몸을 숨겼다. 중무장한 경비들은 여전히 집무실 양옆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순찰을 다니는 경비병들은 현재 멀리 떨어져 있어 증원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에스가 움직이기에는 지금이 적기였다.

 

 에스는 슈트의 스텔스를 해제하며 손목을 두드렸다. 곧 방해 전파가 발생해 일시적으로 두 경비의 통신장비를 두절시켰다.

 

 “뭐야, 무슨 일이지?”

 “교신기가 먹통이 되었어! 경계를 유지해라!”

 

 에스는 조각상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손목에 형성된 고출력 플라스마 라이플을 난사했다.

 

 “침입자다!”

 

 두 경비병은 팔을 들어 머리와 몸통을 보호했다. 곧 간이형 보호막이 작동해 플라스마 탄을 완벽히 방어했다. 에스는 외골격 슈트의 방어력이 생각보다 뛰어난 것을 보고 혀를 차며 다시 조각상 뒤로 엄폐했다.

 

 두 경비 중 한명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에서 총을 빼들어 발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옆의 경비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총통님 수집품에 반물질 탄을 갈기려 하다니, 정신이 나갔냐? 그 빌어먹을 총 치우고 백병전 모드로 전환이나 해!”

 

 조각상 뒤에서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에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계획이 한층 수월해질 것 같았다.

 

 에스는 조각상 너머로 소형 섬광탄을 까 던졌다. 섬광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에스는 조각상 뒤에서 뛰쳐나와 달려들었다. 전력을 집중해 생성해 낸 단분자 칼날이라면 보호막을 뚫고 직접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에스는 오른손을 따라 형성된 예리한 단분자 칼날을 한 경비에게 찔러 넣으려 했다. 하지만, 섬광에 당한 듯 움직임을 멈추었던 경비가 순식간에 거대한 파일드라이버로 에스를 내려쳤다.

 

 에스는 순식간에 칼날을 작은 방패로 변형해 머리를 보호하며 보호막 생성기를 가동했다. 파일드라이버는 너무나 쉽게 보호막을 뚫고 들어왔고, 에스는 간신히 방패를 비스듬하게 세워 파일드라이버를 지면으로 흘려보냈다.

 

 쾅!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지면이 함몰되었다. 에스는 크게 뒤로 뛰어 회피했으나, 쉴 새 없이 다른 경비가 사출한 전기 그물총을 피해 납작하게 엎드렸다.

 

 “후우……. 후우…….”

 

 에스는 잠시 소강상태가 된 틈을 타 호흡을 가다듬었다. 에스의 오른손에서 전력을 다 소모한 나노 봇들이 산산이 흩어져나가고 있었다.

 

 “침입자가 지쳤다! 지금 빨리 가서 제압하자!”

 

 두 경비는 순식간에 에스에게 도약했고, 에스는 가볍게 비웃으며 뒤로 뛰어 물러났다.

 

 두 경비는 조각상 사이에 매어 둔 와이어에 걸려 잠시 움직임이 멈췄다. 힘들이지 않고 와이어를 끊어 낸 둘은 다시 에스에게로 달려들려 했으나, 공중에 매어진 거대한 샹들리에가 둘을 덮쳤다. 에스는 재빠르게 뛰어 조각상 뒤로 엄폐했다.

 

 콰콰앙!

 

 엄청난 질량의 샹들리에가 지면과 부딪히면서 큰 파열음을 내고, 복도 전체에서 시작된 진동이 15층 전체를 흔들었다. 조각상들은 엄청난 양의 파편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깨져나갔다.

 

 에스는 조심스럽게 조각상 너머를 확인했다. 샹들리에에 묻혀 경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당분간 나올 수 없는 건 확실했다. 에스는 안심하고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다, 증원이 도착한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지금은 6명밖에 오지 않았지만, 곧 층 전체의 경비가 이 소란을 듣고 집결하게 될 것이었다. 에스는 조각상 반대편에 몸을 숨긴 채로 슈트를 조작했다.

 

 곧, 에스는 조각상 밖으로 뛰쳐나가 복도 벽을 따라 달려 나갔다. 경비병들은 일제히 총을 들어 탄환을 퍼부었다. 슈트의 보호막 생성기가 최대 출력으로 작동되며 탄환 세례를 한번 버텨냈다. 에스는 간신히 복도를 빠져나가 광장으로 나갔다. 경비들은 당황하며 다른 경비에게 교신해 광장을 봉쇄하도록 했다.

 

 에스는 이 일련의 소란을 조각상 뒤에서 지켜보다가, 경비가 슈트 껍데기를 쫓아간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갔다. 웅장한 떡갈나무 문은 별도의 잠금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에스가 가볍게 문을 밀자, 의외로 쉽게 움직이며 밀렸다. 에스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

 

 

 

 

 집무실 안에는 붉은 기가 도는 원목으로 이루어진 가구와 모스그린 색의 융단이 깔려 있었다. 넓은 집무용 책상에는 독수리 문양이 섬세하게 양각되어 있었고, 그 너머에 총통이 의자를 돌린 채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 밖으로 삐져나온 총통의 손은 예리한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고, 커다란 유리창 너머에는 끝없는 인파가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에스는 무기가 없는 지금 상황이 아쉬웠지만, 맨손이어도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에스는 조심스럽게 총통에게로 다가갔다.

 

 “귀한 손님이 무려 과거의 확률변수관리국에서 허수공간을 넘어 행차하셨는데, 변변하게 대접해드릴 게 없어서 미안하군. 일단 차라도 한 잔 하겠나?”

 

 에스는 경악하며 교신을 재개했다.

 

 “빌어먹을. 셀리, 듣고 있어? 우리 임무가 어디선가 새어나…….”

 

 에스의 말은 귓가를 스치는 금속음에 가로막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총통의 손을 떠난 나이프가 깔끔하게 교신기를 가르고 벽 뒤에 박혀 있었다. 에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군더더기 없는 놀라운 나이프 솜씨 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올 줄 알고 있었어. 에스.”

 

 냉소적인 어투에 낭비 없는 동작, 묘기와도 같은 나이프 솜씨……. 에스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아니지만, 그 모두를 가지고 그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에스가 알기론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제임스 S. 워커. 확률변수관리국 1급 요원. 이번 임무는 네 구역과 동위상에 있는 이 구역의 위상에 변동을 주어서 서로의 위상을 간섭시켜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지.”

 

 에스는 주름이 조금 더 지고 머리가 살짝 희끗해진 자신의 얼굴이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동위상에 있는 두 구역은 공명을 시작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같은 미래를 공유하게 되지. 좋은 미래면 상관없겠지만, 인류의 존속이 달린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제임스는 유리창 너머 광장에 모인 인파들을 바라보며 에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특정 시점에서 서로 역위상이 되도록 변동을 준다면 공명이 아니라 간섭이 일어나 두 구역 다 예정된 미래에서 벗어나게 되겠지. 변동은 대규모의 파괴 공작이나 특정 규모 이상의 인명 살상, 또는 큰 영향을 미칠 인물의 암살을 통해 줄 수 있고.”

 

 무감정한 눈으로 피켓을 들며 시위하는 시민들을 지켜보던 제임스는, 이내 돌아서서 에스를 보았다. 마치 그 어마어마한 인파는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에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였다.

 

 “…… 그래서, 이게 20년 후의 내 말로라는 건가?”

 

 에스는 비참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임스에게 말했다. 제임스는 에스의 말을 듣고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지금의 너는 이해가 안 되겠지. 윗놈들한테 아니꼬운 게 많아도 갈아엎을 생각은 자기보신 때문에 하지 않는 놈이니까. 내가 이 길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지.”

 

 에스는 잠시 침묵하며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는 제임스를 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그의 갈색 눈 속에는 비통함과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여려 있었고, 무엇보다 큰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 누군가를 잃었군?”

 “그래.”

 

 제임스는 대답 대신 책상 위에 엎어 두었던 작은 나무 액자를 다시 세웠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빨간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셀리나…….”

 

 액자를 소중히 쓰다듬는 제임스의 눈에 잠시 희망이 돌아왔다. 한동안 액자를 쳐다보던 그는 조심히 액자를 다시 돌려놓았고, 다시 에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20년 전에 그 놈들은 셀리나를 혁명 세력과 내통한다는 심증만으로 증거가 남지 않도록 킬러를 고용해 암살했지. 나는 그 빌어먹을 자식을 추적해 가둬놓고 3일 밤낮을 고문했어. 사실 첫 30분 만에 그 개 같은 자식은 울며불며 자신의 고용주를 떠벌렸지만, 그걸 들어도 분이 풀리지 않더군.”

 

 제임스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속에 쌓인 불길을 에스 앞에서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불길은 제임스의 내면의 중요한 것들을 삼키며 20년 동안 몸집을 키워왔을 것이었다.

 

 “처음 날 이 길로 이끈 건 복수심이었지만, 복수의 끝자락에 도달하고 마지막 놈을 잡아 죽였을 때 비로소 내가 짊어지기로 한 게 보이더군. 그만두기엔 난 너무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안게 되었어.”

 

 제임스는 집무실 책상에 기대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에스는 자신과 똑같은 이 인물이 고통 받는 모습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제임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그들의 비전을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 하지만 내가 할 줄 아는 건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뿐이었어. 더 나은 미래를 가로막는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설득과 화합이 아니라 더 빠른 해결책이었지. 결국 내 손엔 복수를 했을 때 묻힌 것보다 더 많은 피가 묻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20년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줄 수 있었어.”

 

 제임스는 다시 한 번 창밖에 모인 시위대를 돌아보았다.

 

 “저들을 봐. 나 덕분에 굶주리지 않게 된, 우둔한 자들이지. 이전까지는 내가 짊어진 자들이었지만, 지금은 더 나은 미래의 걸림돌일 뿐이야. 그리고 난 지금까지 그래왔듯 같은 방식으로 걸림돌들을 내 길에서 없앨 수밖에 없어.”

 

 시위대를 바라보는 제임스의 눈에는 일말의 적개심조차 없었다. 에스는 제임스가 마치 망가진 장난감을 고치는 것처럼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발포 명령을 내릴 인물이라고 확신했다. 에스는 냉랭한 목소리로 제임스에게 말했다.

 

 “나는 살생을 하더라도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항상 스스로를 다잡았다. 살생에 무감각해지면 살인마와 다를 게 없지. 지금 네 모습도 마찬가지야.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저들을 죽이려 하지. 아마 네 경비들한테 달아놓은 그 빌어먹을 장치를 작동시킬 때도 마찬가지일 거야. 내가 널 죽일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널 죽이기 전에 물어볼 것이 있다.”

 

 제임스는 에스의 결정에 그다지 놀라지 않은 듯 보였다. 에스는 제임스의 태도에 짐작했던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20년 전에도 똑같은 임무를 수행했다면, 어째서 파국을 막지 못했나? 하다못해 셀리나도 구해내지 못했어. 어째서지?”

 

 제임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묵은 상처를 억지로 벌리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20년 전에 지금 너에게 말해준 것들을 들었다. 세세한 부분은 다르지만, 큰 줄기는 같았지. 내가 파멸을 막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 아니면, 내가 셀리나를 구하지 않고 손 놓고 있었을 놈으로 보이나?”

 

 제임스는 평정을 잃고 뱃속의 불길을 토해냈다.

 

 “내 노력은 무엇 하나 바꾸지 못했어! 화합을 위해 내민 손은 걷어차였고, 셀리나를 구하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들은 오히려 그녀를 죽게 만들었지. 이제 좀 궁금한 게 해소되셨나?”

 

 에스는 망연자실한 채 자신이 저지르게 될 실패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는 비웃듯 에스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물어볼 차례다. 날 죽이고 돌아가면 일시적으로 두 구역의 미래를 분리할 수는 있겠지. 당장 내가 살상 명령을 내리지 못하면 저 밖의 수천만은 구원받는다. 하지만 그 후에 네놈이 걷게 될 길은 나와 다를 거라고 믿나?”

 

 에스는 제임스의 눈 속에서 갈 곳을 잃은 분노와 증오를 보았다. 맹렬히 타오르는 감정의 격류는 에스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네놈은 결국, 내가 했던 실패를 고스란히 반복할 것이다! 난 알 수 있지. 왜냐하면 결국 넌 나니까! 너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엇 하나 바꿀 수 없어! 네 구역에서 미래에 죽게 될 수천만도 구할 수 없고, 당장 셀리나의 목숨조차도 구할 수 없겠지!”

 

 에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제임스가 퍼붓는 저주의 말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분노에 찬 채 씩씩거리던 제임스는 말을 멈추고 화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한동안 에스를 노려보던 제임스는 크게 한숨을 쉬곤, 서랍을 열어 낡은 권총을 꺼냈다. 화약으로 작동하는 구식 자동권총이었다.

 

 제임스는 슬라이드를 당겨 총을 장전하고, 슬라이드를 다시 당겨 약실에 탄이 들어갔는지 확인했다. 총이 확실히 장전된 것을 확인한 제임스는 자동권총을 들고 에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에스는 장전을 해놓고도 굳이 다가오는 그를 보고 제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에스의 코앞까지 다가온 제임스는 권총을 휙 돌려 총신을 잡고 자루를 내밀었다.

 

 “이 모든 것을 듣고도, 날 죽일 수 있겠나?”

 

 총을 받아 든 에스는 눈을 감고 총신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금속이 손가락 끝에 닿자, 에스는 나이프를 손질하는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에스의 이성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혼란스럽던 머리가 정리되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에스는 다시 눈을 떴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이런 방법밖에 몰라.”

 

차가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

 

 

 

 

 시위대는 계속되는 항의에도 묵묵부답인 확률변수관리국을 견디지 못하고 안으로 몰려갔다. 경비들은 시위대를 제지하려 했으나, 위에서 별다른 방침이 내려오지 않아 서로 뒤엉켜 허우적댈 뿐이었다.

 

 결국 시위대는 경비들과 함께 총괄 집무실에 도달하게 되었고, 굳게 닫힌 총통의 집무실 문을 두들겨 부쉈다. 돌입하려는 시위대와 필사적으로 밀어내려는 경비들은 집무실 문이 열리고 펼쳐진 광경에 모두 실랑이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집무실 안에는 총통이 오른손에 권총을 쥐고 관자놀이에 총상을 입은 채로 죽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한동안은 큰 혼란이 일었지만, 곧 시위대에서 대표가 나와 상황을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인망이 높았던 그는 총통 휘하의 인물들을 차례로 설득하거나 추방하기 시작했고, 확률변수관리국 또한 여러 기관으로 분리되어 총통이 집권하던 때만큼의 권한은 잃게 되었다.

 

 총통의 시신이 부검된 결과, 그는 근거리에서 오른쪽 관자놀이에 가해진 총격으로 즉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자살에 사용된 권총에는 총통의 지문이 묻어있었고, 머리를 관통한 탄환과의 탄흔도 일치했다.

 

 다만, 자살에 사용된 구식 자동권총은 두 발 발사된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반은 두 번째 탄환을 찾기 위해 집무실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아낼 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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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v34 꾸꾸맘 노화방지 2018-07-28 01:34:34

    한편의 sf영화를 본 느낌입니다

    시간여행도입부분부터 전투씬까지, 글쓴이의 상상력이 돋보입니다. 눈앞에서 그려지는듯한 훌륭한 묘사력에 감탄하고갑니다. 재미있게잘봤습니다.

    1. 배페인 님이 이 댓글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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