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글
  • No. 446   209 hit   2018-07-29 12:40:50
주제 교환 이벤트 - 흑기사 +5 (7)
  • User No : 897
  • 새내기
    Lv10 배페인

 끔찍하게 더운 여름이었다.

 

 기록적인 폭염 아래 만물이 더위에 고통 받고 있었고, 기껏 내린 비도 더위를 식혀주진 못할망정 습도만 잔뜩 올려서 불쾌지수만 높여놓고 있었다.

 

 더위를 피해 에어컨이 빵빵한 카페에서 찻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당분간은 저 찜통으로 나가기 싫었다. 물론, 내가 이 카페에 계속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건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창가쪽 테이블에 두 남녀가 서로 마주 앉아 얘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 쪽은 내게 뒷모습만 보이고 있었고, 머리에 왁스칠을 해 시원하게 넘겨 훤칠하게 생긴 남자는, 여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열심히 입을 놀려 어떻게든 여자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남자 쪽에 최대한 경멸을 담아 노려봤지만, 남자와 시선이 마주칠 뻔 하자 재빨리 모자를 눌러 쓰며 내 앞에 놓인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남자 쪽은 잠시 위화감을 느꼈지만, 이내 앞의 여자에게 집중했다. 폼을 잡으려고 시킨 것이 분명한 쓰디쓴 아메리카노는 30분째 반도 줄지 않고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대화는 사실상 남자 혼자만의 일방통행으로 진행되었고, 결국 남자는 여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여자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거리로 나갔다. 남겨진 남자는 여자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낙담했다.

 

 나는 카페에서 나가려는 남자를 보고 일어섰다. 남자가 나가는 문을 열고 뜨거운 열기에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 나는 커터칼을 꺼내 남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깔끔한 와이셔츠의 등 부분을 얕게 찢어놓았다.

 

 서둘러 카페를 나선 나는 떠난 여자의 자취를 더듬었다. 분명 이 시간대에 그녀가 갈 곳은 대충 알고 있었다. 소개팅이 맘에 들지 않은 그녀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친구를 불러내 노래방에 가거나, 볼링을 치거나 할 것이 분명했다.

 

 절절 끓는 거리 위를 나무 그늘에 의지해 조심히 이동하던 나는, 저편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보곤 속도를 늦췄다. 그녀는 나를 볼 수 없지만, 나는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볼 수 있는 거리. 내가 가장 선호하는 그녀와 나의 거리였다.

 

 처음 그녀를 지하철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운명이라 생각했다. 얇은 화장을 한 새하얀 피부의 그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공주와 같았다. 깨끗하고 투명한 팔에는 잡티 하나 없었고, 새하얀 원피스 아래 드러난 매끈한 종아리는 마치 특상품 도자기와 같았다.

 

 황홀경에 빠져있던 나는 곧 지하철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하고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결코 동화 속 왕자가 될 수 없었다. 내가 본 동화에는 뚱뚱하고 못생긴 여드름투성이의 왕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나마 예술품과도 같은 그녀를 본 것에 만족하고 나는 전철에서 내리려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공주를 구하는 기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항상 공주를 지켜보다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구해내고 자신을 밝히지 않고 사라지는 흑기사.

 

 전율에 사로잡힌 나는 닫히려는 문을 비집어 열었다. 경고음이 울리면서 안내 방송을 통해 지하철이 닫힐 때 억지로 나가려 하지 말라는 차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지만, 운명적인 의무감에 사로잡힌 내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흑기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상념에 빠져 그녀의 뒤를 쫓던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예상대로 그녀는 늘 가던 볼링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항상 그녀가 볼링장을 갈 때에는, 동성인 친구밖에 만나지 않는걸 알고 있어 나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들어갔다.

 

 볼링장에 들어간 나는 자리를 잡고 있는 그녀를 멀찍이서 보았다. 카운터의 직원이 안내를 망설이고 있자, 나는 선수를 쳐 그녀와 네 칸정도 떨어진 레인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볼링을 치는 척하며 그녀 쪽을 흘낏 보았다. 내 눈에 있을 수 없는 것이 들어와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가 모르는 남자와 즐겁게 웃으며 레인을 향해 공을 굴려 넣고 있었다.

 

 키가 큰 갈색 피부의 그 남자는 가볍게 공을 보내 멋지게 스트라이크를 성공시켰고, 그녀는 환호를 지르며 남자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던 남자는 곧 그녀를 불러 볼링공을 쥔 그녀의 손을 뒤에서 잡아 주며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음흉한 마음을 품은 늑대가 나의 아름다운 공주에게 접근하는 건 여러 번 있었고, 몇몇 건은 그녀의 거절로 끝나고, 또 다른 몇몇 건은 내가 몰래 나서서 막아냈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와 이렇게 가까워진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을 그에게 짓고 있었고, 그 역시 그녀에게 따뜻하지만 가증스러운 미소로 돌려주고 있었다.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달려 나가 둘을 떼어 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는 분명 너에게 음흉한 마음만을 가지고 접근했을 거라고. 오래 널 지켜본 나니까 알 수 있다고. 그는 진정한 그녀의 아름다움을 모를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지켜줄 것을 그 운명의 날로부터 맹세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곧 나는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무거운 볼링공을 들었다. 어떻게 하면 저 남자를 그녀의 옆에서 치워버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자기 주제를 알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감히 그녀의 예술품과도 같은 몸에 손을 댄 더러운 저 손을 분질러버릴 수 있을까?

 

 나는 레인을 향해 분노에 찬 걸음을 내디디며 몸을 낮춰 볼링공을 던졌다. 몸을 옆으로 빼던 나는 곧 균형을 잃었고, 15파운드 볼링공이 손가락을 빠져나와 레인에 충돌했다. 곧 더 육중한 내 몸도 엎어져 볼링장 전체에 둔탁한 소음이 울려퍼졌다.

 

 볼링장 내부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놀란 직원이 다가와 나에게 다친 곳은 없냐고 물어봤고, 소리에 놀란 볼링을 치던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그 중엔 그녀도 있었다.

 

 일어나지 못하고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던 나는 견디지 못하고 직원이 만류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볼링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한적한 밤거리를 걷는 그녀의 뒤를 조심스럽게 쫓고 있었다.

 

 볼링장에서의 일 후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본분을 자각하고 안전한 그녀의 귀갓길을 위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 후 그 남자의 행적은 쫓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손을 써둬야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가로등이 밝혀진 길을 걷던 그녀는 이상한 낌새를 챈 듯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들킬까봐 빨리 전봇대 뒤로 몸을 숨겼다. 살짝 고개를 빼 그녀 쪽을 살펴보자, 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에게로 연락하고 있었다. 요즘 그녀는 밤길을 걷다가 불안감을 느끼는 듯 부모님이나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연락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그녀를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 놈이 누구인지 덜미를 잡기 위해 요즘 계속 이렇게 그녀의 귀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거리를 걷기 시작했고, 나는 전봇대가 만들어주는 그늘 사이사이로 숨어가며 그녀를 지켜보며 뒤따랐다. 만약 그녀의 밤길을 무섭게 하는 누군가가 발견되면 나는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볼링장에서 그녀와 함께 있던 그 남자는 일단 제쳐두고, 나는 직면한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전봇대 뒤에 숨어서 그녀를 지켜보며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등 뒤로 경찰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제가 이번 이벤트에 받았던 주제는 '스토커'입니다.

 

1. 정력왕 님이 이 게시물을 좋아합니다.
2. 도프리 님이 이 게시물을 좋아합니다.
3. 꾸꾸맘 님이 이 게시물을 좋아합니다.
ㅎㅎ
  • 1
  • Lv38 정력왕 삑삑, 학생입니다. 2018-07-29 14:26:54

     스토커가 되어가는 초반부의 심리묘사가 참.. 맘에듭니다. 

     

    결국 독점욕과 소유욕을 정당화 하기 위해 저사람의 기사가 되겠어라고 하는 그러한 비뚤어진 정당화가 스토킹을 유발할수도 있다는..

     

    마지막 결말에 경찰이 나온게 해피엔딩이라 헤헤... 

     

     

    재밌는 글 잘 봤습니다!

    1. 배페인 님이 이 댓글을 좋아합니다.
     
  • 2
  • Lv38 도프리 자작그림에 관심이 많은 2018-07-29 17:55:25

    놀란 직원이 다가와 나에게 괜찮은 곳은 없냐고 물어봤고,

    오타인 것 같네요 

    ~나에게 다친 곳은 없냐고~

    라고 하려 하셨던 거죠?

     

    재밌네요 스토커가 자신이 가장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인지도 모르고 흑기사를 자청하다 경찰에게 잡히다니.

    1. 배페인 님이 이 댓글을 좋아합니다.
    Re 배페인 님이 3 번 댓글을 작성했습니다.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 3
  • Lv10 배페인 새내기 2018-07-29 18:04:32

    Re 2. 도프리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어구야 퇴고를 충분히 안한게 들켰네요 ㅎㅎ; 오타지적 감사합니다

     
  • 4
  • Lv34 꾸꾸맘 노화방지 2018-07-29 18:30:45

    스토킹하려는 흑심을 흑기사라는 왜곡된 마음으로 스스로 설득시키는게 참 흥미로웠어요

    사랑이란 참 이해할수도 없고 납득할수도 없는 감정이고, 이만큼 사람을 비정상적으로 만드는 힘은 없을꺼에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해피엔딩 ㅅㅅ

    1. 배페인 님이 이 댓글을 좋아합니다.
     
  • 5
  • Lv01 네빙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2018-07-29 18:56:14

    스토커 퇴치 엔딩 좋아여!

     

    스토커 시점에서 여자를 지켜보는 단계가 참 무섭네요

     

    잘 봤습니다!

    1. 배페인 님이 이 댓글을 좋아합니다.
     
자작글
구 배틀페이지의 자작글 게시판 안내입니다.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Lv01 에스퍼
2016-01-28
12:23:38
4,095
제2회 장르 문학 동아리 단편 대회 수상작 발표 +9 (15)
열다섯 살
Lv38 키르슈
2018-07-15
17:47:24
833
473 [주제교환이벤트] 제 32차 정기 겨울 토벌 보고서 +2 (2)
할 일 없는
Lv11 시류
2018-09-17
00:37:21
45
472 주제 교환 이벤트 - 황혼의 티 타임 +2 (3)
새내기
Lv14 배페인
2018-09-16
09:31:38
70
471 주제 교환 이벤트 엽편-POTATO AND TOMATO +2 (1)
삑삑, 학생입니다.
Lv39 야한꿈꾸는정력왕
2018-09-14
00:28:37
73
470 (1)
Lv39 뱀술
2018-09-11
03:53:28
56
469 지루해졌다... +2 (1)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Lv01 닐스
2018-08-23
02:56:49
230
468 나는 천재로 태어났다.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Lv01 닐스
2018-08-20
12:42:44
126
467 개노잼 소설 -7- +1
자유의 날개
Lv38 스타크래프트2
2018-08-19
00:50:43
108
466 저 하늘의 별 - 2 (1)
새내기
Lv11 배페인
2018-08-18
21:01:41
99
465 개노잼 소설 -6- +1
자유의 날개
Lv38 스타크래프트2
2018-08-18
05:25:18
102
464 어머니 친구 딸내미 시리즈 현재까지 정리
전문 카운슬러
Lv38 야한꿈꾸는누운G
2018-08-17
17:31:47
123
463 습작) 닭이 되지 못한 채 외 3개.
알아서 로그인되는
Lv32 아스카
2018-08-16
12:52:02
130
461 개 식용에 관한 고찰
알아서 로그인되는
Lv32 아스카
2018-08-16
02:49:00
134
460 저 하늘의 별 - 1 +1 (1)
새내기
Lv11 배페인
2018-08-15
15:49:34
114
459 +2 (3)
삑삑, 학생입니다.
Lv38 정력왕
2018-08-15
03:52:54
147
458 개노잼 소설 -5- +1 (1)
자유의 날개
Lv38 스타크래프트2
2018-08-13
23:06:46
110
457 저 하늘의 별 - 프롤로그 +1 (1)
새내기
Lv11 배페인
2018-08-11
22:10:02
128
456 [단편] 아내 살인범을 찾습니다. +3 (5)
노화방지
Lv34 꾸꾸맘
2018-08-11
01:37:49
187
455 개노잼 소설 -4- +2 (2)
자유의 날개
Lv38 스타크래프트2
2018-08-11
01:08:06
119
454 개노잼소설 -3- +1 (1)
자유의 날개
Lv38 스타크래프트2
2018-08-05
00:28:04
127
453 개노잼 소설 -2- +1 (1)
자유의 날개
Lv38 스타크래프트2
2018-08-01
22:43:29
137
452 버질 설정집 2. 오크식 외날검(Orcish Katana) +3 (3)
게임 리뷰어
Lv38 버질
2018-08-01
21:33:32
168
451 개노잼 소설 -1- +1 (2)
자유의 날개
Lv38 스타크래프트2
2018-07-31
21:50:31
151
450 주제 교환 이벤트 - 검 +5 (3)
눈팅하고 있는
Lv38 기번
2018-07-29
22:41:01
197
449 주제 교환 이벤트 - 마녀의 저주 +5 (6)
노화방지
Lv34 꾸꾸맘
2018-07-29
21:38:21
239
448 주제 교환 이벤트 - 프로틴 보충제 +4 (4)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Lv01 네빙
2018-07-29
17:59:41
166
447 주제 교환 이벤트 - 소나기 오니까 (주제 : 소나기) +4 (6)
자작그림에 관심이 많은
Lv38 도프리
2018-07-29
17:36:25
187
446 주제 교환 이벤트 - 흑기사 +5 (7)
새내기
Lv10 배페인
2018-07-29
12:40:50
209
445 주제 교환 이벤트 자작 소설 -버거. +4 (7)
삑삑, 학생입니다.
Lv38 정력왕
2018-07-29
01:51:23
185
443 버질 설정집 1. 강령술사(Necromancer) +2 (1)
게임 리뷰어
Lv38 버질
2018-07-28
23:13:46
161
442 살아남은 악당, 죽은 영웅. +1 (3)
새내기
Lv10 배페인
2018-07-26
13:00:56
239
  • 에스퍼코퍼레이션     사업자등록번호 : 846-13-00110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15-인천남동구-0494 호     대표 : 황상길(에스퍼)
    개인정보 관리책임자 : 황상길(에스퍼, webmaster@battlepage.com)
    SINCE 1999.5.1. Copyright(c) BATTLEPAGE.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