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글
  • No. 324   134 hit   2017-09-21 20:57:23
산다이바나시 - 오이, 소나기, 아버지 +2 (1)
  • User No : 664
  •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Lv01 그렝

흐으읍

 

수원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코끝을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 채웠다.

진하게 농축된, 여자아이의 체취.

혜영의 방, 여자아이의 방.

수원은 혼미해진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수원은 심호흡을 한 후 자세를 바로 잡았다. 하지만 혜영이 물기를 닦으라고 건넨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다 보니 또 이내 표정이 풀어져버렸다.

 

30분 전, 수원은 주번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혜영이 교정 앞에서 비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수원을 기다린 것은 아니겠지. 같은 반 친구라고 해도 말을 나눈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친하다 안 친하다를 따지기 전에 그다지 접점이 없었다. 혜영은 한 달 전에 전학 온 학생이었다. 단정한 외모에 전학 왔다는 신비감이 더해져 한동안 뭇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외에는 말수가 없고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는 것이 수원이 아는 혜원의 특징 전부였다.

하지만 비가 오고, 아무도 보는 시선이 없는 와중에, 곤란해 하는 여자아이를 지나칠 정도로 수원이 쑥맥은 아니었다. 수원은 헛기침을 해서 자신의 기척을 알리고 말을 꺼냈다.

 

저기, 우산 없어?”

 

하고 슬쩍 눈치를 봤는데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수원의 존재는 알아차렸는지 수원이 있는 쪽으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안경을 쓸 땐 몰랐는데 벗으니까 눈이 꽤 크구나, 하고 수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 우산 크니까 같이 쓰고 갈래?”

“......”

 

혜영이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수원은 가지고 온 장우산을 폈다. 그리고 혜영의 팔을 잡고 슬쩍 당겼더니 거부하지 않고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비 냄새를 뚫고 달콤한 여자아이의 향기가 훅 끼쳤다. 수원은 당황하지 않고 혜영의 팔에서 손을 뗀 후 우산을 조금 높게 들어 올렸다. 그렇게 한 우산 아래에서 수원과 혜영은 나란히 걸었다.

빗줄기가 가늘어지며 빗소리는 줄었지만, 수원과 혜영의 분위기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평소에 아무런 왕래도 없었던 사이. 같은 우산을 쓰고 간다고 해서 공유할 이야기 거리가 솟아나진 않는 것이었다.

침묵을 깨고 수원이 말을 꺼냈다.

 

근데...... 저기, 너무 가까이 붙는 거 아니야?”

 

농담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혜영은 거의 두 사람이 겹칠 정도로 수원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수원이 살짝 옆으로 가려고 하면 혜영도 자연스럽게 스며들 듯 같이 따라왔다. 물론 면대 면으로 딱 붙은 것은 아니었지만 움직일 때마다 슬쩍 슬쩍 스치는 것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어깨, 팔꿈치, 엉덩이, 발목, 머리,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까지.

 

안 그러면 둘 중 한 사람은 비를 맞게 되잖아?”

맞는 말이긴 한데.”

 

혜영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수원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지만 이대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래도 신경 쓰이니까 떨어져 줘, 비는 내가 맞을 테니까.’ 라고 말하려고 입을 여는 사이.

 

......”

아빠가 남자가 우산 씌워줄 땐 이렇게 붙어 있으라고 했어.”

아버님이 그러셨으면 어쩔 수 없지.”

 

더 이상의 말대답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혜영이 수원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그 기세에 눌려 수원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대답이 자동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수원은 어쩔 수 없이 혜영과 밀착해서 걸어야만 했다. 의외로 단호한 성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우리 집 바로 여기야.”

 

큰 도로를 두 번 지나 왼쪽 골목으로 한참 들어가자 주택가가 나타났다.

호화로운 대문 같은 걸 보면 잘사는 동네인 것 같았다.

혜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기품이 있는 주택이었다.

 

, 그러면 안녕. 내일보자.”

저기.”

?”

 

뒤를 돌아보니 혜영이 수원의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젖었으니까. 우리 집에서 옷 좀 말리고 갈래?”

아니, 덕분에 별로 안 젖었어, 염려해 줘서 고마워.”

젖었잖아! 바지나 가방 같은 거!”

 

혜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얼굴이 빨개진 것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그건 집에 가서 해결해도......”

라면이라도 먹고 가.”

다이어트 중이라.”

아빠가 도움을 준 남자한테는 꼭 집에서 대접하라고 하셨어.”

 

실화냐.

너네 아버지 뭐하시는 분이냐.

혹시 에스키모는 아니시겠지?

라고 처음 말을 튼 사이에 말할 수는 없었다.

혜영의 알 수 없는 박력에 아무 말도 못하고 따라갔다. 수원은 그렇게 처음 말을 튼 전학생의 집에 입성하게 된 것이었다. 아빠는 출근하셨고 엄마는 사업차 출장 나가셨다고 했다. 처음에는 현관에 있겠다고 했지만 혜영은 한사코 수원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아빠한테 혼난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수원은 혜영이 말한 이상한 근거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혜영이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더라도 외간 남자와 딸내미가 단 둘이 있는 것을 알면 눈에 불을 키고 달려와 패죽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자기가 결혼해서 딸을 낳아도 그럴 테니까.

딸을 낳을 수는 있을까.

결혼은 언제 할까.

나의 결혼상대는 누구일까.

혜영이? 설마.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수원은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방문을 연 것은 다행이도 혜영이었다.

 

큰일 났어!”

 

혜영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수원은 그것보다 혜영의 사복차림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향긋한 샴푸냄새가 풍겼다.

 

, 무슨 일이야. 아버지가 오셨어?”

아니...... 그게 아니라.”

벌써 우리 관계가 들킨 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쩔 수 없군, 상대해 주지.”

아냐 정신 차려!”

 

수원의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뺨이 불타는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손바닥이 아닌 뭔가 단단한 둔기로 맞는 느낌이......

 

오이?”

그래 어떻게 된 게 집에 오이 밖에 없어!”

뭐야, 뭐 그런 걸 가지고.”

안 돼. 안된단 말이야. 으앙!”

 

수원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자 혜영은 침대로 쪼르르 달려가 울었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무너지는 완벽주의 성향인 모양이었다. 그런 주제에 과정은 굉장히 어설프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수원은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혜영에게 다가가 귓가에 한마디 속삭였다. 혜영이 울음을 멈추었다.

 

좋아해.”

 

물론 마지막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오이를.” 

1. 도프리 님이 이 게시물을 응원합니다.
  • 1
  • Lv35 도프리 자작그림에 관심이 많은 2017-09-21 22:34:30

    이 작품은 아버지와 오이가 억지로 들어가버린 탓에 혼돈의 카오스가 되어버린 겁니다.

     

    프푸프풋해서 좋았구만 왜!

     
  • 2
  • Lv03 SakaiMomoka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2018-06-17 19:54:04

    이분은 공부하시는 중이라 키워드 3개로 글쓰는 연습중이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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